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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스가 나간 뒤 무너진 회사 — 빈자리의 크기는 무엇으로 정해질까

Daniel · · 조회 216
에이스가 나간 뒤 무너진 회사 — 빈자리의 크기는 무엇으로 정해질까

제일 일 잘하던 사람이 나가고 2년 뒤에 회사가 문을 닫았다는 글을 봤습니다. 익명 커뮤니티에서 석 달간 가장 많이 읽힌 글이었어요. 7만 명 넘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회사를 무너뜨린 건 그 사람이 하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리는 채워졌는데 왜 무너졌을까요

작은 회사의 에이스였다고 합니다. 처우 문제로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경영진 반응은 이랬대요. "그 자리 채울 사람은 많다."

실제로 자리는 채워졌습니다. 일도 그럭저럭 돌아갔고요. 무너진 건 다른 쪽이었습니다. 글쓴이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임원진의 지시와 실무자의 고충을 조율해 주던 완충재가 사라지니 위아래가 날것 그대로 부딪히기 시작했거든요."

"중간에서 오해를 풀어줄 사람이 없으니 서로에 대한 불만과 갈등이 스노우볼처럼 굴러가다가, 시너지는커녕 각자도생하기 바쁜 조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사람이 하던 업무는 인수인계가 됐습니다. 인수인계가 안 된 건 그 사람이 매일 막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만든 것에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통 자기 가치를 이렇게 계산합니다. 내가 만든 결과물, 달성한 숫자, 맡은 프로젝트. 실적표에 적히는 것들이죠.

그런데 빈자리의 크기는 다르게 측정됩니다. 그 사람이 하던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막던 문제로 측정됩니다.

막는 가치에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있을 때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나 보인다는 겁니다. 회의가 매끄럽게 끝나고, 두 팀이 안 싸우고, 후배가 안 헤맵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났으니 실적표에 적을 게 없습니다. 그러다 그 사람이 빠지면 그제서야 그 자리에서 뭐가 계속 막히고 있었는지 보입니다.

팀 역할을 연구한 학자들은 이걸 아예 별도의 역할로 분류해두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메러디스 벨빈은 경영 시뮬레이션에 참여한 팀들이 왜 어떤 조합에서는 성과가 나고 어떤 조합에서는 무너지는지 관찰하다가, 팀에 필요한 역할을 아홉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사람 사이를 잇고 마찰을 줄이는 역할입니다. 결과를 만들어내는 역할과 동등하게 필요한 항목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즉 조율은 성격 좋은 사람의 부수적인 미덕이 아니라, 팀이 굴러가는 데 필요한 기능 하나입니다.

실적표에 안 잡히는 일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이 일들이 인정을 못 받는 진짜 이유는 가치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이름이 없어서입니다.

"회의 끝나고 어긋난 얘기를 맞춰뒀다"는 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니까 아무 데도 안 적힙니다. 안 적히니 평가 자리에서도 못 꺼내고, 못 꺼내니 본인도 그걸 실력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첫 단계는 어필이 아니라 이름 붙이기입니다.

실제로 하는 일 붙일 수 있는 이름 보이게 만드는 한 걸음
회의 끝나고 서로 다르게 이해한 걸 맞춰둠 결정 정렬 회의록에 '합의된 것 / 아직 미정인 것' 두 줄 남기기
윗선의 지시를 실무가 알아들을 말로 바꿈 요구 번역 받은 지시를 실행 기준으로 바꿔 팀에 공유
두 팀 사이에서 말을 옮기고 오해를 풂 부서 간 연결 어떤 건은 누구에게 물으면 되는지 목록으로 정리
사고가 나기 전에 미리 잡아둠 사전 차단 막은 문제와 판단 근거를 한 줄로 기록
후배가 편하게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줌 질문 창구 반복되는 질문 3개를 문서 한 장으로
예전에 왜 그렇게 결정했는지 아는 사람 맥락 보관 주요 결정의 이유를 남기는 로그 만들기
나가기 전에 한 번 봐주는 사람 최종 점검 자주 걸리는 실수 유형을 체크리스트로
개발·비개발 사이에서 말을 통역함 언어 번역 요청서 양식에 '왜 필요한지' 칸 추가
애매한 요청을 정리해서 되물어줌 요청 정제 요청 접수 시 받아야 할 항목 고정
분위기가 굳었을 때 긴장을 푸는 사람 긴장 완화 (기록은 어렵지만) 팀 회고에서 언급되게 하기

연차가 낮아도 해당되는 줄이 있습니다. 신입이 조율할 위치는 아니지만, 후배가 편하게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일이나 반복 질문을 문서로 만드는 일은 1년 차도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에 하나만 적어보세요

방법은 간단합니다.

이번 주에 내가 한 일 중, 결과물로는 안 남았는데 없었으면 일이 꼬였을 일 하나를 적고 이름을 붙인다.

세 줄이면 됩니다.

  1. 무슨 일이 있었나 (예: 마케팅팀과 개발팀이 요청 범위를 다르게 이해하고 있었음)
  2. 내가 뭘 했나 (예: 양쪽 말을 정리해 한 문서로 만들고 확인받음)
  3. 안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예: 2주치 작업이 다시 갔을 것)

세 번째 줄이 중요합니다. 막은 가치는 안 일어난 일이라 그걸 적어야만 크기가 보입니다.

이름을 붙이면 뭐가 달라지나요

두 가지가 달라집니다.

첫째, 옮길 수 있게 됩니다. 인정은 내가 만든 것이 남에게 건너가 쓰일 때 생기는데, 이름이 없는 건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저 요즘 조율 많이 했어요"는 안 건너가지만, "부서 간 요청 접수 양식을 만들어서 재작업이 줄었습니다"는 건너갑니다. 이름 붙이기는 내가 만든 걸 남에게 건너가게 만드는 일의 첫 단계입니다.

둘째, 스스로 그걸 실력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이게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조율을 잘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착각이 "나는 특별한 기술이 없고 그냥 사람들이랑 잘 지낼 뿐"이라는 겁니다. 그 상태로 이직 준비를 하면 자기소개서에 쓸 게 없습니다. 실제로는 팀을 굴러가게 만든 기능을 매일 수행했는데도요.

"한 사람 없다고 무너질 회사면 문제 아닌가요"

이 반론이 원문에서도 가장 많은 공감을 받은 반대 의견이었습니다. "사람 한 명 없어서 무너질 회사면 언제든 무너진다"는 말이요.

맞는 말입니다. 특정 개인에게 의존해야만 돌아가는 조직은 이미 위태롭습니다. 조율이 한 사람 머릿속에만 있으면 그건 그 사람의 공로인 동시에 조직의 취약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론이 "그러니 그 사람을 붙잡아라"로 가면 반만 맞습니다. 정확한 결론은 그 기능을 눈에 보이게 만들어 놓으라는 쪽입니다. 회의록 양식으로, 요청 접수 항목으로, 결정 로그로 남겨두면 그 기능은 사람이 바뀌어도 남습니다.

개인 입장에서도 같습니다. 내 가치를 지키는 방법은 나만 아는 상태로 두는 게 아니라, 그 일에 이름을 붙여 내 실력으로 만들어두는 겁니다. 나만 아는 일은 지금 자리에서는 강해 보이지만 밖에서는 설명이 안 됩니다.

정리하면

결과물로 안 남는 일이 가치가 없는 게 아닙니다. 가장 늦게 발견되는 가치일 뿐입니다. 이름이 없어서 안 보였던 것이죠.

이번 주에 하나만 적어보세요. 없었으면 일이 꼬였을 일 하나와 거기 붙일 이름. 그리고 주변에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떠오른다면, 그분에게는 그 일이 보인다고 한 번 말해주셔도 좋겠습니다. 실적표에 없는 실력은 알아봐 주는 사람이 생길 때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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