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잘러

일은 줄었는데 성장하는 느낌이 없다면 — AI가 가져간 건 배우는 자리입니다

Daniel · · 조회 97
일은 줄었는데 성장하는 느낌이 없다면 — AI가 가져간 건 배우는 자리입니다

복사, 회의록 정리, 자료 취합. 신입 때 하던 그 일들이 지금 다 AI한테 가고 있습니다.

솔직히 편합니다. 저도 반복되는 일은 거의 다 넘기고 있어요. 그런데 그 일들이 원래 해주던 게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뭔지 알고 넘기는 것과 모르고 넘기는 것이 몇 년 뒤에 꽤 큰 차이를 만듭니다.

지루한 그 일이 사실은 배우는 자리였습니다

회의록을 정리해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그 지루한 걸 하다 보면 누가 무슨 결정을 왜 내리는지, 이 회사 일이 어떤 순서로 굴러가는지가 어깨너머로 들어옵니다.

자료 취합도 그렇습니다. 취합 자체는 단순한데, 하다 보면 어느 팀이 뭘 들고 있고 어디에 물어봐야 답이 나오는지가 그려집니다. 견적서를 여러 번 만들어보면 단가가 하나 바뀔 때 어디가 흔들리는지 감이 생깁니다.

일의 산출물은 문서였지만, 그 일이 실제로 만들고 있던 건 사람이었습니다.

"하다 보면 는다"는 말은 그래서 오래 통했습니다. 반복 업무가 배움의 통로 역할을 하던 시대의 문장이었으니까요. 통로가 끊기면 이 문장은 더 이상 자동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지금 채용 시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요

이건 개인의 체감만이 아닙니다. 숫자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취업 교육 서비스 제로베이스가 2026년 8월에 공개한 가입자 데이터를 보면, 3월에는 신입 가입자가 51%로 경력직보다 많았는데 4월에 경력직 72%, 5월 74%, 6월 86%, 7월에는 87%가 됐습니다. 넉 달 만에 가입자 10명 중 9명이 경력직으로 바뀐 겁니다. (ZDNet 2026-08-10)

KBS도 2026년 5월 보도에서 같은 흐름을 다뤘습니다. 신입이 맡던 업무가 자동화되면서 채용 자체가 줄어드는 현장을 취재하며 "그 사다리가 끊겨버린 거죠"라는 표현이 나왔습니다.

여기서 저는 "AI가 일자리를 뺏는다"는 결론으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미 많이 나왔고, 나온 만큼 각자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대신 이 흐름이 알려주는 건 다른 겁니다. 회사가 사람을 키우던 기본 장치 하나가 조용히 빠졌다는 사실입니다.

일은 줄었는데 성장하는 느낌이 없다면

이미 일하고 있는 분들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신입 채용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내 책상 위의 이야기입니다.

반복 업무를 넘길 때마다 그 일에 딸려 있던 배움까지 같이 넘어갑니다. 처리 시간은 줄었는데 1년 전과 비교해 아는 게 늘지 않은 상태. 일은 확실히 빨라졌는데 어딘가 얇아진 느낌.

그건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배우는 통로가 같이 끊긴 겁니다.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그 일을 다시 손으로 하라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저도 안 돌아갑니다. 이건 속도를 포기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속도를 얻으면서 배움만 따로 챙기자는 이야기입니다.

넘기기 전에 물어야 할 질문 하나

일을 AI에 넘기기 전에 이 질문 하나만 먼저 하시면 됩니다.

"이 일이 원래 나한테 가르쳐주던 게 뭐지?"

답이 떠오르면 일은 그대로 넘기고, 그 배움만 다른 방식으로 챙기면 됩니다. 시간은 1~2분이면 충분합니다. 아래는 자주 넘기는 업무별로 정리한 표입니다. 자기 일에 가까운 줄만 보시면 됩니다.

넘기는 일 그 일이 원래 가르쳐주던 것 넘긴 뒤에도 챙기는 법 (1~2분)
회의록 정리 누가 무엇을 왜 결정하는지, 조직의 판단 기준 의견이 갈렸던 지점 하나와 그때 결론이 왜 그쪽으로 갔는지 한 줄로 적기
자료 취합 어느 팀이 무엇을 들고 있는지, 정보의 지도 이번에 새로 알게 된 담당자·자료 출처를 내 목록에 추가
보고서·기획서 초안 윗사람이 무엇을 먼저 보는지, 설득의 순서 내 초안과 최종본을 나란히 놓고 바뀐 순서 한 군데 확인
데이터 정리·집계 숫자의 정상 범위 감각 결과에서 이상해 보이는 숫자 하나를 직접 파고들어 원인 확인
리서치·자료 조사 출처의 신뢰도를 가르는 눈 인용된 원문 중 가장 중요한 하나는 직접 열어보기
고객 문의 1차 응대 고객이 실제로 막히는 지점 주간 문의 유형 상위 3개는 직접 훑고 변화 확인
번역·문서 정리 그 분야의 용어와 관용 표현 처음 본 용어 3개는 따로 적어두고 뜻 확인
코드 초안·보일러플레이트 구조를 짜는 관례와 이유 생성된 코드 한 군데는 "왜 이렇게 짰는지" 근거를 확인
일정·미팅 조율 이해관계자 지도와 우선순위 조율이 막힌 이유를 한 줄로 기록(사람 문제인지 구조 문제인지)
견적·비용 계산 비용 구조와 민감한 변수 어떤 항목이 바뀌면 결과가 가장 크게 흔들리는지 한 번 확인

핵심은 표를 다 채우는 게 아닙니다. 넘긴 일마다 한 줄씩 남기는 습관입니다. 회의록은 AI가 정리해도, 결정이 갈렸던 지점 한 줄은 내가 적는 식으로요.

그럼 AI를 덜 쓰라는 말인가요

반대입니다. 저는 AI로 할 수 있는 일은 더 많이 넘기는 쪽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AI가 못 하는 일이 뭘까"를 지키는 방향으로 가면 그 자리는 계속 작아집니다. 물어야 할 건 "AI를 써서 나는 어디까지 만들 수 있나"입니다. 이 글은 그 방향을 되돌리자는 게 아니라, 속도를 얻는 동안 조용히 빠져나가는 것 하나를 붙잡아두자는 이야기입니다.

반론도 있습니다. "AI 덕분에 오히려 더 빨리 배운다. 예전엔 3년 걸려 보던 전체 그림을 지금은 물어보면 바로 설명해준다"는 말이요. 절반은 맞습니다. 설명을 듣는 속도는 확실히 빨라졌습니다.

다만 설명을 듣는 것과 판단을 해보는 것은 다릅니다. 회의록을 읽는 것으로는 "이 조직은 이럴 때 이렇게 결정하는구나"가 몸에 안 들어옵니다. 그 자리에 있으면서 어긋난 의견이 어떻게 좁혀지는지 봐야 들어옵니다. 그래서 챙길 것도 요약이 아니라 판단이 갈린 지점입니다.

정리하면

배움이 기본으로 딸려오던 시대는 끝나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회사에 오래 있으면 자동으로 늘었지만, 이제는 배움을 따로 설계한 사람만 늡니다.

거창한 설계가 아니어도 됩니다. 일을 넘기기 전에 "이 일이 나한테 뭘 가르쳐주고 있었지"를 한 번 묻고, 그 답을 한 줄로 남기는 것. 그게 통로가 끊긴 자리에 내가 새로 놓는 다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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