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뭘 잘하는지 모르겠다면 — 없는 게 아니라 이름이 없는 겁니다
MBTI도 해보고, 적성검사도 해보고, 자기계발서도 몇 권 읽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지를 다 펼쳐놓고도 "그래서 나는 뭘 잘하는 거지?"라는 질문 앞에서는 여전히 막막합니다. 이런 밤을 보내본 분이라면, 오늘 이야기가 도움이 될 겁니다.
코칭에서 만난 5년 차 직장인 한 분의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이분의 결론도 똑같았습니다. "디자인은 디자이너만큼 못하고, 기획은 기획자만큼 못하고. 나는 잘하는 게 없다." 그런데 이분은 얼마 뒤 달라졌습니다. 회사도, 연봉도, 앉는 자리도 그대로인 채로요.
왜 검사를 해도 내가 뭘 잘하는지 모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름이 없어서입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검사 결과지를 쌓아두고 막막해하던 바로 다음 날 회의에서, 후배가 복잡한 일정을 설명하다 길을 잃었습니다. 이분이 화이트보드 앞에 서더니 흩어진 일을 묶고 순서를 다시 놓았습니다. "이건 같이 진행하면 2주 줄어요." 회의실이 조용해졌고, 팀장이 말했습니다. "복잡한 걸 단순하게 정리하는 능력이 뛰어나네요."
정작 본인만 어리둥절했습니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하던 일이라, 그게 능력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여기에 커리어 고민의 본질이 있습니다. 진짜 잘하는 일일수록 나에게는 쉽습니다. 쉬우니까 특별해 보이지 않고, 특별해 보이지 않으니까 "잘하는 것" 목록에 올라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힘들게 해낸 것만 능력으로 계산하는 버릇이 있는데, 능력의 증거는 고생이 아니라 남들과의 격차입니다. 남들은 몇 시간 걸리는 일을 나는 30분에 끝낸다면, 그게 쉬워 보여도 능력입니다.
검사가 소용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검사는 좋은 단서를 줍니다. 다만 결과지의 단어가 내 일상의 장면과 연결되지 않으면, 결과지는 서랍으로 들어가고 막막함은 그대로 남습니다. 연결의 첫 단추가 바로 이름 붙이기입니다.
이름이 붙으면 무엇이 달라지나요?
그분에게 이날 붙은 이름은 '구조화'였습니다. 없던 능력이 생긴 게 아닙니다. 매일 하던 일에 이름이 붙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름이 붙자 행동이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복잡한 프로젝트가 오면 한숨부터 나왔는데, 이제는 먼저 손을 듭니다. "이건 제가 정리해볼게요." 팀에는 "복잡한 건 이분한테"라는 자리가 생겼습니다. 그 자리는 누가 준 게 아니라 본인이 만든 겁니다.
이름의 힘은 세 가지입니다.
- 꺼내 쓸 수 있게 됩니다. 이름 없는 능력은 우연히 발휘되지만, 이름 붙은 능력은 의도적으로 씁니다.
-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면접에서, 평가 면담에서, 자기소개에서 "저는 복잡한 일을 구조화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 키울 수 있게 됩니다. 무엇을 연습해야 할지가 분명해집니다.
오늘 바로 해보는 이름 붙이기 3단계
퇴근 전에 5분이면 충분합니다.
- 오늘 하루 중 생각 없이 자동으로 해낸 일 하나를 적습니다. 크기는 상관없습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능력인 줄도 몰랐던 일이 후보입니다.
- 그 일이 팀에 만든 결과를 한 줄 적습니다. "내가 회의 내용을 정리해서 → 다음 날 바로 실행이 시작됐다"처럼요.
- 거기에 이름을 붙입니다. 거창한 단어일 필요 없습니다. 아래 표에서 가까운 것을 골라도 되고, 내 말로 지어도 됩니다.
어떤 일에 어떤 이름이 붙는지, 자주 나오는 짝을 정리했습니다.
| 자동으로 하고 있는 일 | 이름 후보 |
|---|---|
| 회의록·자료를 어느새 내가 정리하고 있다 | 구조화 |
| 일정이 꼬이면 다들 나부터 쳐다본다 | 조율 |
| 분위기가 어색해지면 내가 먼저 말을 꺼낸다 | 촉진 |
| 모르는 게 나오면 어느새 자료를 찾아보고 있다 | 탐색 |
| 다 끝났다는 문서에서 오탈자·빈틈이 눈에 띈다 | 완결 |
| 다들 고민할 때 "일단 해보죠"라고 말하게 된다 | 추진 |
| 긴 이야기를 듣고 나면 핵심을 한 줄로 말하게 된다 | 평가 |
| 사람과 사람, 정보와 정보를 어느새 잇고 있다 | 연결 |
| "완전히 다르게 해보면?"이 자꾸 떠오른다 | 발상 |
이름을 붙일 때 주의할 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남과 비교하지 말고 빈도로 판정하세요. 그 일이 나에게 자주 맡겨진다면 그게 증거입니다. 둘째, 한 번에 하나만 붙이세요. 여러 개를 한꺼번에 붙이면 아무것도 또렷해지지 않습니다.
이름만 붙인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정당한 반문입니다. 이름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이름을 붙인 다음에는 그 일을 의도적으로 더 맡아보고, 결과를 기록하고, 그 이름으로 나를 설명하는 연습이 이어져야 합니다. 이름이 그 모든 다음 단계의 손잡이가 되는 것뿐입니다.
다만 순서는 분명합니다. 손잡이가 없으면 문을 열 수 없습니다. 새벽 3시에 결과지를 쌓아두고 막막해하는 대신, 오늘 자동으로 해낸 일 하나에 이름을 붙이는 것. 거기서부터 막막함이 쓸모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 이야기의 전체 여정 — 새벽 3시부터 '구조화'라는 이름, 그리고 그 후의 변화까지 — 는 제 책 「내 커리어엔 내가 없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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