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말라고 해서 안 했는데 그게 평판이 됐다면 — 혼자 만든 규칙
입사 한 달 반 된 신입이 게시판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 평판, 회복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사연을 보면 좀 이상합니다. 이분이 한 거라곤 하지 말라는 걸 따른 것뿐이거든요.
뭘 도우려고 하면 "제가 할게요" 하면서 방해된다는 식으로 말하고, 행사 짐을 챙기다가 제 일 하라는 소리를 몇 번 들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뗐더니, 이제는 눈치가 보여서 멀뚱멀뚱 서 있는 날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그 마음은 아실 겁니다. 뭘 하자니 또 혼날 것 같고, 가만있자니 그것도 눈치 보이는 상태요.
그러다 어느 날 사수가 부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팀원들 일할 때 적극적으로 나서야지. 다들 지켜보고 있고, 그게 네 평판이 된다."
멈추라고 해서 멈췄는데 이번엔 멈췄다고 혼나는 겁니다.
멈추게 한 사람과 평가하는 사람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서 먼저 볼 게 있습니다. 사수가 나쁜 것도 아니라는 점이요. 사수 눈에는 멈춰 있는 모습만 보였을 테니까요.
"제가 할게요"라고 했던 그 사람은 그날 급해서 한 말이라 기억도 못 할 겁니다. 그리고 사수는 그 말을 들은 적이 아예 없죠. 그러니까 한 자리에서 벌어진 일이 두 사람에게 따로 남았고, 뒤에 남은 건 "안 했다"는 사실 하나뿐입니다.
회사에서 멈추라는 신호는 꽤 정확하게 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멈추라는 건지는 안 옵니다. 그 기간을 우리가 혼자 정합니다.
한 번 들은 말이 왜 계속 지키는 규칙이 될까요
민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번 민망하면 대개 "앞으로 쭉"으로 정하게 됩니다.
"제가 할게요"는 그날 한 번의 말이었는데, 듣는 순간 얼굴이 화끈해지니까 그 말이 '앞으로 저 일엔 손대지 말자'로 굳어버리는 거죠.
여기서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한 번 피하기 시작하면 그 규칙이 틀렸다는 걸 확인할 기회가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회피 행동을 다룬 학습 연구에서 오래전부터 나온 문제입니다. 조지프 르두 연구팀이 2017년 『Molecular Psychiatry』에 정리한 글을 보면, 피하는 반응은 유독 잘 안 없어집니다. 이유가 좀 얄궂은데, 피해버리면 안 좋은 일이 실제로는 안 일어난다는 걸 겪어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확인을 안 하니까 그 규칙만 계속 살아남는 겁니다.
동물 실험 얘기를 사람 사무실에 그대로 붙일 건 아닙니다. 다만 구조가 똑같습니다. 그 일에 손을 안 대는 한, 지금 손을 대도 아무 일 없다는 걸 알 방법이 없습니다.
멈춘 건 다 보이는데 멈춘 이유는 나만 압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됩니다.
회사에서는 안 한 일도 보입니다. 그런데 안 한 이유는 나만 압니다.
여러분도 한 번 데인 자리에서 손 뗀 일이 하나쯤 있을 겁니다. 의견 냈다가 분위기가 싸해진 뒤로 회의에서 말을 아낀다든가, 도와주려다 거절당한 뒤로 그 사람 일은 안 쳐다본다든가요.
그건 소극적인 게 아닙니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그 자리에서 규칙을 하나 만든 거죠. 성실한 사람일수록 이런 규칙이 많습니다. 한 번 들은 말을 흘려듣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문제는 그 규칙이 나만 아는 규칙이라는 겁니다. 억울한 이야기를 할 때 내가 한 몫이 비어 있으면 안 믿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유는 말해야 전해지거든요.
내가 혼자 만든 규칙부터 찾아봅니다
먼저 목록으로 꺼내보시는 게 좋습니다. 대개 자기도 몇 개나 있는지 모르거든요. 아래 표를 세 줄만 채워보세요.
| 무슨 일이 있었나 | 그래서 내가 정한 것 | 확인해본 적 있나 |
|---|---|---|
| (예) 도와주려다 "제가 할게요" 소리를 들었다 | 그 사람 일에는 손대지 않는다 | 없음 |
| (예) 의견 냈다가 회의가 싸해졌다 | 그 주제에는 말을 얹지 않는다 | 없음 |
| (예) 보고를 짧게 했다가 지적받았다 | 무조건 길게 쓴다 | 없음 |
오른쪽 칸이 전부 '없음'으로 채워질 겁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그리고 그 칸이 비어 있다는 게 지금 문제의 전부이기도 합니다.
세 줄을 다 쓰고 나면 대개 이런 게 보입니다. 한 번 들은 말은 하나인데 내가 만든 규칙은 그보다 넓습니다. "이번 행사 짐은 네가 안 챙겨도 돼"라는 말이 '앞으로 모든 행사에서 나서지 않는다'가 되어 있는 식이죠.
막히는 그 자리에서 한마디만 물어봅니다
제일 좋은 건 규칙이 만들어지는 순간에 끊는 겁니다. 문장 하나면 됩니다.
"그럼 다음에도 이건 제가 손 안 대는 게 나을까요?"
이 한마디가 하는 일은 한 번인지 계속인지를 그 자리에서 정하는 것입니다. 혼자 만든 규칙이 둘이 정한 규칙이 되는 거죠. 그리고 대부분은 이렇게 답합니다. "아니에요, 그때만요." 그 한마디에 '앞으로 쭉'이 하루로 줄어듭니다.
상황별로는 이렇게 씁니다.
| 막힌 상황 | 그 자리에서 쓰는 말 |
|---|---|
| 도움을 주려다 거절당했을 때 | "그럼 다음에도 이건 제가 손 안 대는 게 나을까요?" |
| 의견을 냈다가 분위기가 식었을 때 | "이 주제는 제가 안 꺼내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방식만 바꾸면 될까요?" |
| 담당에서 빠졌을 때 | "이번만 제외인 건지, 앞으로 이 일은 다른 분이 맡는 건지 알고 싶습니다." |
| 하지 말라는 말만 들었을 때 | "그럼 이 상황에서는 제가 뭘 하는 게 제일 도움이 될까요?" |
| 보고 방식을 지적받았을 때 | "다음부터는 이 형식으로 가면 될까요? 한 번만 맞춰두고 싶습니다." |
| 회의에서 말이 잘렸을 때 | "제 얘기는 나중에 따로 드리는 게 나을지, 그 자리에서 말씀드려도 될지 여쭤봐도 될까요?" |
| 일정이 갑자기 바뀌었을 때 | "이번만 이렇게 가는 건지, 앞으로도 이 순서인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
| 선배마다 말이 다를 때 | "두 분 방식이 달라서요, 제 건 어느 쪽에 맞추면 될까요?" |
| 혼나고 나서 | "제가 뭘 다르게 했으면 좋았을지 한 가지만 짚어주시면 그대로 하겠습니다." |
| 아무 설명 없이 배제됐을 때 | "제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으면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고쳐서 하겠습니다." |
전부 따지는 말이 아니라 확인하는 말입니다. 앞에 "제가 잘 몰라서 여쭙는데요" 정도만 붙이면 훨씬 부드럽게 나갑니다.
이미 몇 달 멈춰 있는 일은 어떻게 다시 열까요
그 자리에서 못 물어본 일들이 있으실 겁니다. 몇 달이 지나면 다시 꺼내기가 더 어려워지죠. 그래도 순서만 지키면 생각보다 쉽게 열립니다.
하나, 이유를 사건이 아니라 내 판단으로 말합니다. "그때 과장님이 하지 말라고 하셔서요"라고 말하면 누군가를 탓하는 모양이 됩니다. "그때 제가 손 떼는 게 맞다고 판단했었는데"라고 말하면 그냥 내 판단을 다시 보는 일이 되고요. 상대도 편하게 받습니다.
둘, 지금 시점의 확인으로 묻습니다. "지금은 제가 이 부분 맡아도 될까요?"까지만 가시면 됩니다. 과거를 정리하려 들면 대화가 길어지고, 대개 상대는 그 일을 기억도 못 합니다.
셋, 한 번은 작게 실제로 해봅니다. 말로만 풀린 규칙은 다시 굳습니다. 작은 걸로 한 번 손을 대보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걸 겪으셔야 그때 진짜로 없어집니다. 앞서 본 회피 연구의 결론도 결국 그겁니다. 확인은 해봐야 되는 거죠.
그럼 매번 다 물어봐야 하나요
그러면 피곤한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물어보는 것 자체가 새로운 눈치가 되죠.
기준은 하나면 충분합니다. 그 말 때문에 내가 앞으로 안 하기로 정하게 됐을 때만 물으시면 됩니다. 듣고 넘어가지는 일, 한 번 하고 마는 조정은 확인할 것도 없습니다. 확인이 필요한 건 내 행동 목록에서 뭔가가 통째로 빠지는 순간이고, 그건 생각보다 자주 오지 않습니다.
반대로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물어봤는데도 "알아서 좀 해"라는 답만 돌아오는 자리요. 그때는 확인을 반복하지 마시고 짧게 기록만 남겨두시는 게 낫습니다. 나중에 평판 얘기가 나왔을 때 "이때 이렇게 확인드렸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평판이 나빠졌다면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혼자 만든 규칙이 쌓여서입니다.
그리고 그 규칙들은 하나같이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서 상처받지 않으려고 만든 거니까요. 다만 그 이유가 나한테만 있고 밖으로는 안 나갔던 겁니다.
지금 막혀서 손 놓은 일이 하나 떠오르셨다면, 그 일부터 한 줄 적어보세요. 무슨 일이 있었고, 그래서 내가 뭘 안 하기로 정했는지요. 적고 나면 대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거 물어보면 되는 거였네.
사람마다 한 번 들은 말을 붙들고 있는 정도가 다르고, 어떤 말에 유독 오래 걸리는지도 다릅니다. 내가 어디에 민감한 사람인지 궁금하시면 9WAY 강점 진단이 참고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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